밤나무는 밥나무다

Dahurian Birch 2018. 11. 16. 15:05

https://news.v.daum.net/v/20181116144024883

밤은 밥이다. 8년 전 수목원에 심었던 300그루 밤나무가 올가을 대풍년을 맞았다. 몇 가마를 수확했는지 모른다. 유실수 단지를 만들면서 밤알이 굵고 당도가 높다는 묘목을 샀다. 함께 심었던 헛개나무, 음나무 1000그루 묘목 값보다 두세 배 더 들었다. 내년이면 헛개나무 열매인 산호를 닮은 달콤한 과병(果柄)도 맛볼 수 있을 것 같은 예감도 든다.

그동안 반송 3000그루 가꾸기에 정신이 팔려 소 닭 보듯 무심히 지나쳤던 밤나무들이 저 혼자 자랐다. 거름을 따로 주거나 농약을 치지도 않았는데, 나보란 듯이 늠름하게 알밤의 존재감을 자랑한다. 살다 보면 이처럼 의도하지 않은 착한 결실을 얻기도 한다. 자연 생태계의 장엄한 운항을 인간의 잣대로 재려는 조급함을 유쾌하게 배반한다. 가을빛에 영롱하게 반사되는 밤 한 톨의 결정체 속에 한여름 뙤약볕과 천둥 몇 개를 품었는지도 모른다. 쩍쩍 벌어진 밤송이 가시를 피해가며 굵은 알밤을 줍는 첫 수확의 기쁨에 들떠선지 가을 햇빛이 짧다. 작은 행복을 크게 생각하며 살라고 웅변하는 것 같다. 풍년은 밤나무가 만들었는데, 이웃에게 밤을 나눠주는 기쁨은 내가 차지하는 가을날이 됐다.

과실나무는 묘목을 심고 칠팔 년이 지나서야 결실을 확인할 수밖에 없다. 농부의 신뢰를 저버리지 않은, 얼굴도 모르는 묘목장수의 약속이 고맙기도 하다. 땅을 믿고, 나무를 믿고, 사람을 믿고 살아야 한다. 밤나무도 유실수인 사과나 배나무처럼 삼사십 년이 되면 고목으로 주저앉을 것이다. 그 무렵에는 튼튼한 묘목을 다시 심어야 한다고 손자에게 당부하는 것도 잊지 않을 것이다. 올겨울은 몇 날 며칠을 삶거나 구워서 밥 대신 밤을 먹을 것 같다.

밤은 영양가가 쌀의 절반을 차지할 정도로, 각종 비타민을 풍부하게 함유한 대용식량 자원이다. 산에는 밤알이 잘지만 달콤한 자생 산밤이 있고, 동네마다 가난을 벗어나기 위해 심은 밤나무가 숲을 이루기도 한다. 경향 각지에 ‘밤나무골’이 있다. 임진강변 화석정 아래 율곡 이이의 율곡리, 율촌 로펌, 율산 그룹 등은 밤나무가 많은 고향을 그리며 작명했는지도 모른다.

오랫동안 우리 곁에 살아온 기록도 백제, 고려 때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고려 때는 왕명으로 밤나무를 심게 하여 구휼(救恤) 식량으로 예비한 기록도 있다. 도토리를 맺는 참나무들 중 알이 제일 굵은 상수리나무는 임진왜란 때 쫓기며 어려움을 겪던 선조의 수라상에 올려져 ‘상수리’라는 이름을 얻었다고 한다. 부족한 식량을 보완해 굶주림을 극복하게 한 효자들임에 틀림없다. 대개 밤송이에는 3정승을 뜻하는 밤알 3톨이 가지런하게 들어 있다. 가운데 녀석이 몸집을 부풀리면 양쪽 밤알은 찌그러들 수밖에 없는 것은 사람 사는 세상과 같다.

싹이 트고 자란 후 밤나무를 캐보면 뿌리에 밤 껍데기가 남아 있음을 볼 수 있다. 이것을 후손의 번성과 절개, 그리고 순수한 혈통이라는 의미로 읽어 밤나무가 숭조(崇祖)의 상징목이 됐다. 과실은 전통적인 관혼상제(冠婚喪祭)에 쓰이는 귀중한 상징이었다. 제사 준비 때 생율(生栗)을 치는 일은 남자들의 유일한 몫이었다. 고등학교 때쯤, 이제는 네가 하라며 아들에게 밤 치는 칼을 넘겨주던 아버지의 따듯한 눈길을 생각하면 지금도 그리움의 경련이 인다.

도회지의 초여름은 아까시나무의 향기에 포위된다. 뒷산이나 유휴지에 번창하는 아까시나무가 하얀 꽃들을 무더기로 달고, 달콤한 꿀과 향기에 취한 벌·나비들과 무도회가 한창일 때다. 이 향기의 여운이 가시고 뒤이어 메밀꽃 필 무렵이면 더욱 짙어진 밤꽃 향기가 뒤를 잇는다. 원초적 본능 같은 향기라고 얼굴을 붉히는 사람은, 혼삿날 시어른께서 며느리 치마 위에 다남(多男)을 기원하며 대추와 함께 던져주던 알밤의 아련한 추억을 떠올렸기 때문일 것이다.

이종화 시인은 ‘밤나무꽃 숲속에서’에서 ‘하얀 꽃 향 은은한데/ 산속에는 하얀 물결 정든 님을 부르네/ 하얀 물결 은빛 바다 옛 추억의 달콤함에…/ 자연 속에 살고파서 밤꽃 향에 안기련다’고 노래하기도 한다. 시인은 가지가 휘어질 만큼 피어난 밤꽃 물결에서 은빛 바다를 떠올리고, 자연을 밤꽃 향기와 짝짓는 젊은 날을 그리워한다. 나무는 가지 하나하나가 또 하나의 나무다. 거수(巨樹)가 된 밤나무 한 그루가 향기 짙은 밤나무 숲이 될 수 있는 이유다.

‘나도밤나무’ ‘너도밤나무’라는 나무는 설화(說話)에 물들어 있다. 율곡 이이가 어렸을 때, 탁발 온 스님이 이이를 보고 호랑이에게 물려 죽을 상이라 했다. 놀란 어머니 신사임당에게 뒷산에 밤나무 1000그루를 심으라 했다. 스님으로 변장한 호랑이가 다시 와서 율곡을 데려가겠다고 하자 신사임당이 약속대로 심은 밤나무밭을 보여주었다. 두 그루가 죽어 998그루만 남아 있었다. 호랑이가 본색을 나타내 율곡을 물어가려 하자 그곳에 있던 나무가 ‘나도 밤나무다’라고 했고, 옆에 있던 나무에게 ‘너도 밤나무잖아’라고 해 호랑이가 물러갔다고 한다.

너도밤나무는 울릉도 성인봉의 높은 곳에만 자란다. 마가목과 함께 울릉도를 대표한다. 조그마한 세모꼴의 도토리를 달며, 잎은 밤나무보다 약간 작고 통통하게 생겼다. 나도밤나무는 밤나무와는 다르다. 밤나무보다 잎이 약간 크고 콩알만 한 새빨간 열매가 줄줄이 매달리며, 남쪽 해안가 어디에나 자란다. 사랑의 약속에 증인이 되기도 하는 ‘마로니에’라고도 불리는 칠엽수의 맨들맨들한 껍질 속의 열매도 앙증스럽게 귀여운 작은 밤과 같다. 그러나 독성이 있다. 이 가을을 지키는 밤나무만이 우리의 밥나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