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득 징자(澄子)란 인물이 떠올랐다. 하나도 유명하지 않은 인물이지만 그와 관련된 일화가 ‘여씨춘추’에 전한다.
그는 춘추전국시대 사람으로, 하루는 길에서 검은 옷을 잃어버렸다. 옷을 찾아 나선 그의 눈에 마침 검은 옷을 입은 여인이 띠었다. 냉큼 다가선 그는 다짜고짜 옷을 벗겨 가져가려 했다. 여인이 옷을 꼭 쥐고 놓지 않자 당당하게 말했다. “방금 내가 검은 옷을 잃어버렸소.” 그러자 여인이 대꾸했다. “나리께선 검은 옷을 잃어버리셨나 봅니다. 허나 이 옷은 제가 직접 지어 입은 것입니다.” 순간 징자는 사뭇 의아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러곤 을러댔다. “얼른 옷을 내게 주는 것이 나을게요. 내가 잃어버린 옷은 두 겹짜리인데 지금 그대 옷은 홑겹이오. 홑겹으로 두 겹과 맞바꾸는 것이니 그대가 남는 장사 아니겠소?”
아쉽게도 ‘여씨춘추’엔 그래서 어찌 됐다는 결말까지 실려 있진 않다. 하지만 필자의 촉으로는, 그 여인은 결국 옷을 빼앗겼을 것이고 징자는 아무런 죄책감도 못 느낀 채 잘 먹고 잘 살았을 것이다.
그래서 퍽 궁금해진다. 인간의 도덕적 본성을 마비시키고, 인간답게 살라고 자연이 선물한 이성이나 감성, 직관 같은 역량을 악용케 하는 힘의 정체가 말이다. 동료교수 중 한 분은 이를 ‘상상력’이라고 표현했다.
단적으로 ‘더러운 상상력’이라는 것이다. 그것은 비유컨대 악성 종양이다. 이에 걸리면 인간을 탁월하게 만들어주는 제반 역량이 온통 흉기로 변한다. 이성은 탐욕을 거머쥐는 데 악용되고, 감성은 마음이 악행에 무뎌진 악마를 닮아가게 한다. 그렇게 인간다움은 시나브로 소거된다. 그러다 전이가 진척되면 삿된 욕망이 자아를 점령한다. 하여 세상은 응당 자기를 중심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착란에 빠져든다. 자아가 더러운 상상력에 된통 감염돼 자기를 객관화할 수 있는 역량이 고갈된 탓이다.
물론 이런 증세가 늘 겉으로 드러나는 건 아니다. 그래서 항상 주시해야 한다. 자기 이익 실현에 필요하다 싶으면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심각한 병증으로 발현되기 때문이다.
상상력이 ‘착한’ 이들, 달리 말해 상상력을 더럽게 악용하지 않는 이들은 사뭇 다르다. 조금만 비겁해지고 한 번만 외면하면 큰 이익을 볼 수 있다고 해도 그들은 차마 그렇게 하지 않는다.
더러운 상상력을 상용하여 자기 이익을 극대화하면 뭐하겠는가. 그 자신은 인간다움을 포기한, 존엄은커녕 역사에 더러움의 표상이 됐으니 말이다.
http://v.media.daum.net/v/201712111444469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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