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 가장 큰 책

Dahurian Birch 2018. 12. 14. 18:04

https://news.v.daum.net/v/20181214123041740

황무지에 젊은이가 삽 한 자루를 들고 뛰어들었다. 어린나무를 심고 물을 줘가며 울창한 지성의 숲을 꿈꾸었다. 손자 대에나 과실을 얻을 수 있다는 독림가(篤林家)의 자세로 나의 길을 걸었다. 한길로 40년을 간다.

저수지는 가장 낮은 곳에 자리 잡는다. 나남출판이라는 지성의 저수지를 어떤 세파에도 무너지지 않게 튼튼하게 쌓으려면 낮은 곳에 임하는 겸손을 배워야 했다. 따르고 싶은 올곧은 선배들을 저자로 많이 모실 수 있는 행운도 같이했다.

이제는 포천 신북 20만 평의 수목원에 그분들 숫자를 넘는 반송(盤松)과 자작나무 숲을 가꾸는 자신을 발견한다. 책이 나무다. 사람들은 소풍이 끝나면 어느 별로 돌아간다. 이 시대의 지적 성과로 자부하는 우리 책들은 수목원 책박물관에서 빛날 것이다.

그러나 나무는 수백 년 이 자리를 지킨다. 출판 본업을 지키고 권력의 유혹을 떨치기 위해 나무를 심었다. 퇴계(退溪)처럼 나이 들어 스스로 택한 만은(晩隱)이 아니다. 수목원은 세속의 크고 작은 유혹을 견뎌내고 나 자신을 지킬 수 있었던 출구였다. 가끔은 천둥벌거숭이 아마추어가 세상을 뒤흔드는 역사를 이루기도 한다고 한다. 20년 가까이 준비한 수목원의 장관에 놀라는 사람이 많아졌다. 나무는 스스로의 생명력으로 우리가 의도하지 않은 생태계의 숲을 만들기 때문이다. 세상에 나이 들면서 점점 더 아름다워지는 것은 나무밖에 없다. 나도 나무처럼 늙고 싶다. 긴 세월의 풍파를 고스란히 이겨낸 뒤에 얻어진 초월과 해탈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나무처럼 아름답게 늙고 싶다면 당연히 나무처럼 살아야 한다. 나무처럼 살지 않으면서 나무처럼 늙고 싶다고 해서는 안 될 일이기 때문이다.

이제는 수목원으로 생명의 존엄을 가꾸는 일이 ‘세상에서 가장 큰 책’을 만드는 일일지도 모른다. 5년 전 한겨울에 서설(瑞雪)을 찾아 수목원의 아무도 밟지 않은 눈길에 동행했던 임병걸 시인이 ‘세상 가장 큰 책’이라는 시를 즉석에서 선물했다. 퇴계는 자신의 묘비명을 제자나 지인이 쓸 경우, 꾸미고 과장되게 지어 부끄러울까 싶어 스스로 지었다고 한다.

그는 세상의 유혹에 흔들릴 때/ 구상나무 심고/ 세상이 그리울 때/ 빠알간 복자기 심었다/ 세상이 답답할 때는/ 쭉쭉 뻗는 낙엽송 심었고/ 세상에 고함치고 싶을 때는/ 활활 타오르는/ 자작나무 심었다// 때로 그를 시샘한 세상이/ 폭우를 쏟아부어/ 나무를 덮칠 때는/ 뒹굴던 돌을 쌓아/ 세상의 역류를 막고/ 흔들리는 마음/ 단단히 가두었다// 마침내/ 세상 가장 큰 책을 쓰고는/ 흙 묻은 등산화에/ 낡은 청바지를 입은 그도/ 한 그루 느티나무 되어/ 책 속의 쉼표로 찍혔다/ 겨울에도 푸른 쉼표로.’